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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2008



구지봉형이 표를 구해줘서 펜타포트에 갈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트라이포트를 시작으로, 빠짐없이 펜타포트에 참석 하였는데, 왜 행사때마다 비가  항상 억수같이 내리는지 모르겠다.

재정상, 후지 락페스티벌에 오는 외국 아티스트를 섭외하기 때문에 먼저 한국으로 모시는(?) 구조라고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기후권에 속하지 않는가. 시기가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얄밉다. 펜타포트의 마지막 날은 항상 맑으니까. 
우리는 장마철의 막바지 이고, 후지 락 페스티벌때는 장마철이 끝난 뒤라고 생각하면
왜 한번도 후지 락 페스티벌 이후에 펜타포트를 열지 않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괜찮다. 대신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 그치면 세상이 참으로 예뻐 보이니까

예전 트라이포트(펜타포트의 옛이름) 에 갈때 에어 맥스 한정판 새 조강화를 신고 갔다가 몹쓸 신발로 만들고 돌아온 적이 있다. 
행사는 인천 송도 유원지에서 열리는데, 송도 유원지의 뻘은 락스로 빨아도 안지워 진다.
맨발로 가는 것이 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곳곳에 깔려있는 자갈과 오물 그리고 사람들의 신발이 당신의 발톱을 뽑을지도 모른다.
장화를 신으면  뻘에 장화가 깊숙히 빠져 넘어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운동화를 신자니 뻘을 가득 머금어 신발이 무거워 진다.
뭐 어떻게 해도 뾰족한 수가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펜타포트용 신발을 개발하면 돈좀 많이 벌려나~




이날의 메인은 Ellegarden이었지만, Crying nut의 공연이 제일로 신났던 것 같다.
화려한 폭죽도 적시 적기에 터졌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는 그런 태도가 정말로 신이 났다.



펜타포트에서 놀때에는 모름지기 이렇게 놀아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일년중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뻘밭에서 뻘짓(?)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락 공연문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슬램과 모싱을 하고, 다이빙을 한 뒤에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는것
처음에는 왜 슬램을 하고 모싱을 하나 했지만. 그것이 서로 음악을 공유하는 집단적인 음악체험 행위라는 것을 알게되고 나서부터
나도 자연스레 즐기게 되었다. 그것이 고등학교 1학년때였으니 지금은 꽤 능숙하게 음악을 몸으로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까.
99년 트라이 포트 때에는 슬램하다 넘어진 나를 외국인이 일으켜 세워준뒤 괜찮냐고 물어보더니 다이빙을 시켜 몇백미터를 갔다.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부딪혀서 이해하는 것
글자만을 논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어떤 정의도 설명도 불가능한 힘과 가치는 경험속에 있다.
음악은 글자 속에 없다. 음악적 경험만 있을 뿐이다. 


위 사진들을 월간 Dazed & Confused in Korea 편집장님께 보내었지만,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월간 bling이 한국 Dazed의 모회사인데 두가지의 잡지가 한가지의 소재에 집중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자료를 찾아 볼수록 펜타포트의 사진은 거의 다 행사부스, 아티스트의 사진들 뿐이다.
하지만 펜타 포트에 가 본 사람이라면, 현장의 분위기와 음악과 어울리는 사람들 속에 굉장한 풍경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는 이런 사진이 잡지에서도 빛을 발할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Ps. Ellegarden이 왜 한국내 최고의 히트곡인 Make a wish를 안부르나 했더니 앵콜곡으로 부르기 위해서였다.
      지봉이형과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서로 눈을 보며 손만 뻗혀 들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원은 점점 더 커져갔고, 우리는 2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천천히 돌고 몇백미터가 뻥 뚫렸다. 
      하늘이 뚫려 맑은 공기가 몸을 감쌌다. 카메라를 들고싶었지만 하우징 안에서 건전지 덮개가 떨어져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
      사람들이 모두 싱얼롱을 했다. 우리는 가운데에 단 둘이 남아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 Make~~~ a~~~~~~~~~~~~~~~ Wish와 함께 수천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엮였고 그 풍경은 내가 가장 잊을수 없는 음악적 체험이었다.